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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쏭달쏭 베트남 3. 일본의 식민 지배 모르나? 눈 감고 있나?
    베트남 개괄/알쏭달쏭 베트남 2024. 4. 22. 14:43

     베트남 사람들은 무구한 역사속에서 강대국 중국, 미국, 프랑스를 물리친 것을 자랑삼아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런데 중국, 미국, 프랑스를 물리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떠벌리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거의 들은 바가 없는 듯하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한 것을 배우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독립 이후 일본의 대외 원조가 베트남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기에 눈 감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아심을 갖기도 한다. 

     하노이의 노이바이 공항, 호치민시의 탄선녓 공항, 두 도시의 지하철은 물론 투티엠 지하 도로 등 주요 기반시설에 일본 일장기와 베트남 금성홍기가 나란히 붙어 있으며 일본의 ODA로 건설되었다는 기념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호치민시의 중심 1군에는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이 있고, 그 주변을 일대로 일식집과 주점 들이 즐비하다. 그 뿐만 아니라 호치민시 백화점중 최고자리를 다투는 다케시마야 백화점이 핵심 노른자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쇼핑몰과 더불어 규모면에서도 다이아몬드 백화점(한국)에 월등한 방문 고객수를 갖는다. 또한 1군과 2군의 소위 상류층이 산다는 곳에는 일식당이 주도권을 갖고 영업을 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듯 하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것이 한국인에게 갖는 인식과는 다른 장점인 것 같다. 

     

     그럼 진짜 베트남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잊고 있는 것일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던 중 논문 하나를 발견하였다.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의 노영순 선임연구원이 발표한 [ 일본 점령기에 대한 베트남인의 역사인식과 평가 :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 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을 통해 일제의 베트남 점령이 베트남에 어떤 형식을 취했으며, 결과론적으로 현재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의문을 갖는 대외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베트남이 일본에는 그리 큰 반발이나 적개심을 갖지 않는가에 중점을 두어 정리해 보았다. 

     일제의 베트남 침략과 지배는 1940년 9월 북베트남으로의 진주에서 시작하여 1941년 7월 남부 베트남으로의 진주라는 형태로 완결을 보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 패망하면서 철수하였다. 결국 일본의 베트남 침략과 지배 기간은 5년에 불과하며 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가장 짧은 것이었다. 이 기간을 후인 낀 카인을 일본의 막간극(Japanese Interlude)이라고 명명하였다[ Huynh Kim Khanh, 1982 ]

     특히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프랑스와 여러 협정을 통해 베트남 점령을 인정 받았다. 이를 통해 프랑스 식민정권의 대일협력을 확보하였고 1945년 3월까지 프랑스의 식민정권을 존속시켰다. 1945년 3월 9일 연합군의 인도차이나 상륙이 임박해지고, 프랑스 식민정권의 대일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불인처리(佛印處理)라고 알려진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정권을 타도하고 일본 단독 지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때에도 외형상으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국왕에게 '독립'을 선언하게 하는 형태를 띄었다. 결국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의 기간만을 '일본 점령기'로 불리우는 것이다. 

     

     한 편으로 당시 국제정세에 따라 베트남 내부에서도 일본을 프랑스 식민 제국을 축출하고 독립을 지원할 수 있는 세력으로 간주하는 집단들이 있었다. 그 예로 일본은 당시 프랑스 식민당국의 탄압을 받고 있던 민족 종교인 까오 다이교의 지도자들을 비호해 주고 군사훈련을 시켜 주기도 했다. 심지어 꼬오 다이교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쩐 꽝빈(Tran Quang Vinh)은 자신이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협력하라는 까오 다이 신의 지시를 따랐다' 믿고 있었다.

    친일세력의 대표로 간주되는 '복국동맹회'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복국동맹회는 일본이 프랑스 식민정부를 몰아내고, 1915년 이래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끄엉 데를 수반으로 베트남의 독립정부 수립을 도와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역사 교과서는 친일인사들과 그 정당, 그리고 단체를 '일본의 주구(走狗) : 남의 시킴을 받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따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다음 어학사전 ]" 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친일 = 반민족이라는 직접적인 등식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反프랑스 정서를 가진 개인과 종교단체들이 일본에 의해 이용된 듯한 인상을 주면서 친일파를 강하게 단죄하는 것을 피하면서 국민통합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베트남 교과서에는 이례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아사한 인민이 200만이나 된다는 점을 언급이고 이는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 탄압이 초래한 최종적인 결과라고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남베트남을 관장하던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일본과 전쟁 배상 교섭에서 기근에 대한 책임배상으로 1960년부터 5년간 무상공여 140억 엔, 차관 25억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반면 북베트남은 아사자의 숫자가 200만에서 30~100만으로 축소된 점을 강력 항의 하였다. 하지만 1986년 도이머이(Doi Moi) 개방 개혁을 실시한 이래 공식적으로는 과의 불행이 현재와 미래의 외교관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베트남 식민 지배는 자원의 약탈과 200만명의 아사자 발생 사태 등으로 베트남 사람들에 지울 수 없는 피해를 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5년에 불과하고 그것도 외부적으로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통한 것이었고 직접 지배는 6개월에 불과하다. 즉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1010~1045) 35년 동안의 직접 통치와 수탈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베트남에서 일본은 '지배'라기 보다는 '점령'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에게 일본, 일본인은 그저 지난 과거사에 흠점에 불과한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 호치민시

     하노이와 호치민시 중심에는 프랑스 식민시대에 건설된 많은 건물들이 건재해 있다. 인민위원회, 노트르담 성당, 우체국 등 등. 해마다 프랑스로 부터 얼마 금액을 지원받아 그 건물들을 보수하고 외부 도색 등을 하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 같아선 '쪽 팔리게 그 돈 받아서 보전을 해주나...' 싶은데 관광 명소로 잘 이용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1999년)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 사과했고, 2017년 문재인 대통령도 베트남 전에 관련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려 했지만, 베트남 정부가 한국의 사과를 원치 않는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식민 점령기간 동안의 친일파에 대해 '주구'라는 표현을 쓰고 국민통합을 염두한 것, 1944년 아사자에 대한 배상 협의결과에 대해서도 현재와 미래의 외교관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정부 입장의 견지를 보면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 

     

     '벌써 베트남인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잊었는가!' 라는 일종의 질책과 의문으로 시작하였지만, 이제 베트남 정부와 사람들의 융통성 있고 현실/미래 지향적인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알지! 내 기억속에 그걸 어찌 잊겠노. 그래도 너희와 싸워 뭐 하겠니? 서로 화합하면서 잘 살도록 노력하지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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