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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송달쏭 베트남 5. 위아래도 없는데 유교 국가라고?
    베트남 개괄/알쏭달쏭 베트남 2024. 4. 23. 12:25

     직장에서 상사인 나의 부름이나 지시를 무시하는 듯한 베트남 현지 직원들의 태도에 대해 글을 올린 적이 있다. 특히 근무시간이 끝나고 회식자리에서 맞담배를 피는 아들뻘 직원의 모습에 놀라 현지인들의 생활 방식을 살펴 보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유교가 역사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깊히 자리잡혀 있어서 가족사랑, 장유유서의 모습이 현재의 한국 보다도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고도 말들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모습들은 유교적 사고에서 나온 행동들이 아닌 듯 하여 의아하거나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 녀석들이 내가 외국인이라고 무시를 하는 건가?'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만 적용되는 유교적 관념인가?' 등 

     

    기어 오르는 것일까? 평등한 것일까? :: 베트남 바로 알기 (tistory.com)

     

    기어 오르는 것일까? 평등한 것일까?

    가끔 매장에서 젊은 직원들이 내게 하는 행동을 보면 ‘저게 기어 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베트남 사람들이 저렇게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라고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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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유교에 대해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베트남 유교의 독특한 특징을 다룬 '베트남 왕조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 재밌는 썰을 좀 풀어볼까 함'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유교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였지만 베트남의 유교 문화에는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베트남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었음.... 조선에서 왕과 신하들의 관계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면, 베트남에서의 왕과 신하들의 관계는 사석에서는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였음. 베트남에서는 사석에서는 신하들이 왕에게 말을 놓을 정도로 수평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신하가 왕에게 기분 상할 일이 있으면, 그 신하의 권력이 강한 경우에는 대놓고 정변을 일으키는 게 예삿일이었고 그 때문에 정변으로 인한 왕조 교체가 꽤 자주 있어왔음.

      즉, 베트남의 유교 문화는 수평적인 것이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이 부족할 수 있다는 단점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는 거지. ... 심지어 사대부들과 백성들도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농담 따 먹기를 하는 게 일상인 나라가 베트남이었음. 공적인 자리만 아니면 사석에서는 이 나라보다 상하 관계가 수평적인 나라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 그게 유교 국가 베트남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사실 그래서 중국에서도 베트남 쟤네들의 유교 문화는 뭔가 이상하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베트남 유교의 특수성은 굉장히 유별났다고 말할 수 밖에.

             [ 베트남 왕조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 재밌는 썰을 좀 풀어볼까 함 기사 정리 발췌 ]

     

    맞담배를 넘어 아비뻘에게 담배 건네는 베트남 청년 :: 베트남 바로 알기 (tistory.com)

     

    맞담배를 넘어 아비뻘에게 담배 건네는 베트남 청년

    간만에 매장의 근무자들과 맥주를 한 잔 하며 저녁회식을 하였다. 매장이 오픈한 지도 100일이 훌쩍 지났고, 내가 하는 컨설팅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주요 근무지를 호치민시 사무실로 옮겼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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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랬구나' 무릎이 탁 쳐졌다. 역사적으로 이전부터 그런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라는 고민이 뒤를 따랐다. 신하가 반말을 하면 '저 역적놈에게 사약을 내려라'하면 끝날 것을 ...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에서 이렇게 안 되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베트남 왕조의 군사 조직을 찾다 실마리를 찾았다. 베트남의 마지막 중앙통치 집권 왕조인 응우옌 왕조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이다. 

     

      응우옌 가문은 16세기 이래 베트남 북부의 탄호아 지방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다. 응우옌 가문은 옛날부터 베트남 일대에서 꽤나 힘을 쓴다고 널리 알려져 있던 대귀족 가문이었는데, 965년에는 딘 왕조 아래에서 재상직을 맡기도 했고 레 왕조 시기인 1442년과 1453년 사이 동안에는 섭정직을 맡아 어린 황제 대신 베트남을 대신 통치할 정도로 그 권세가 높았다.
     1527년 막 가문의 막당중이 레 왕조의 공황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자, 레 왕조에 충성을 유지하던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막 왕조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반란을 모의했다.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탄호아 지방에서 반란군을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않아 진압당해 인근의 란쌍 왕국으로 도망쳐 일시적으로 세를 추슬렀다. 당시 반란군들을 이끌던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낌은 레 왕조를 추종하던 자들을 모아 반란군의 세를 불렸으며 1540년에 다시 돌아와 탄호아 지방을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응우옌 김은 1539년에 레 왕실의 장종을 복위시켜 중흥 레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레 왕실은 유명무실한 꼭두각시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에게 나뉘어져 있었다.

     

     베트남 왕조는 최대의 중앙통치 시대에도 지역별로 각 지방 세력이 군사조직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나름의 통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북부의 대월과 사운 참파왕국이 도시국가의 성격으로 대월의 침략에 시기적으로 적절히 결집되지 못해 쇠망한 것처럼, 베트남은 중앙집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분권의 형태를 유지한 국가였던 것이다. 

     

     베트남 왕조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가 약한 상태였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사병을 보유하고 왕과 상대할 수도, 왕조를 교체하기도 한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베트남은 유교의 사상과 통치체계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중앙통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지방 분권에 기반을 둔 느슨한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상황에서 완전한 상하관계가 아닌 병존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는 역사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고대 고구려의 재가회의와 신라의 화백회의를 상상하면 될 듯 하다. 신라의 화백회의에서 상대등이 상석에 앉았슴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다섯 명의 대등도 모두 평등한 권한과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베트남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상하관계에 의한 유교적 질서가 아닌 평등에 기반한 상호 존중의 질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래도 무례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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