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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한국과 베트남
    베트남 개괄/베트남 입문 2024. 5. 3. 21:39

     한국 사람들은 정말 독특하다. 강한 놈들에게는 더 강하고 약자에게는 무한한 애정과 자애를 베푼다. 통상의 말을 하면서도 양키, 미국놈, 떼놈, 쪽발이 일본놈 이라고 하면서 핏대를 세운다. 한편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받고 있는 티벳인, 군사 쿠데타에 시름하는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입에 담으면서도 측은지심이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라중 하나는 중국일 것이다. 물론 왕조별로 보자면 한반도의 신라, 고려, 조선과 비길 바 아니지면 오랫동안 그 몸집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 대단한 나라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화교들이 네크워크를 구축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는 지역을 만들어 살고 있다. 차이나타운이다. 

      현재 서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차이나타운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영국 런던, 페루 리마 차이나타운이며 아시아에선 일본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고베 차이나타운 및 나가사키 차이나타운, 그리고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방콕의 차이나타운이 손꼽힌다고 한다. [ 나무위키, 차이나타운 검색 결과 ]

     

     차이나타운은 중국 출신 화교 네트워크의 중심 지역이다. 중국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화교는 세계 각지에 차이나타운을 만들었고 지역 경제권을 장악했다. 차이나타운은 ‘동향’(同鄕) 네트워크의 확장판이었다. 중국인은 타지로 나가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같은 고향 출신 사람들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현지 경제를 주도한다. 예컨대 1800년대 후반 상하이가 신흥도시로 떠오르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같은 고향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경제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네트워크는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청나라 말부터 쿨리(cooley)라고 불리는 육체노동자들이 해외로 대거 나가면서 차이나타운의 역사가 본격 시작됐다. 화교는 일찌감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에 정착하면서 고유한 생활 영역을 일구어냈다. 일본이나 미국의 대도시에도 화교가 정착하는 곳마다 어김없이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임오군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란을 진압하기 어려웠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한다. 조선으로 오는 청군을 따라온 일군의 중국인이 한반도 최초의 화교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 화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만보산 사건(1931)의 여파로 수많은 화교가 피살되거나 상해를 입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우리 언론이 보도하면서 조선 내 화교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컬처타임즈 2021.05.06 11:53 발췌 인용 ]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화교에 대한 차별은 있었다. 화교가 가는 곳마다 경제권을 장악한다는 인식은 그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부동산 소유를 금지했고, 1963년 화폐 개혁을 통해 화교의 현금을 벽장 속에서 끌어냈다. 심지어 분식을 장려한다는 이유로 중국집 쌀밥 금지령을 내려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화교에 대한 억압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중구 소공동을 중심으로 한, 화교촌은 와해되었고, 한국은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인천 차이나타운

      물론 현재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관광단지 개발로써의 역할이 더 큰 상태이고,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 중국 화교들이 모여 사는 차이나 타운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화교의 재력이 집중되고 세를 과시하는 차이나타운과는 차원이 다른 집장촌의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편, 베트남은 화교가 없는 유일한 아세안 국가라고 한다. 특히 내수에 강한 현지 화교 기업이 없다는 점이 여타의 아세안 국가들과 차별화된다고 한다. 베트남은 화교(華僑)의 경제적 영향력이 사실상 전무한 국가 중 하나다.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화교 자본에 비하면 같은 역내에 위치한 베트남에서 화교의 영향력은 사실상 거의 없는 셈으로 쳐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 이유는 한국 정권이 화교들에 했던 것과 비슷하다.

      베트남 통일 당시 즈엉반민 정권이 패망하고 사이공(호찌민) 함락이 이어지자 대대적인 화교 축출이 시행됐다. 이때 베트남 공산당은 화폐개혁을 통해 베트남 남부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들의 경제권을 흔들어 버렸다.  [ 김태언의 베트남 통(通)]화교 없는 베트남, 한국인에게 여전한 기회의 나라 2020.01.23 참조 ]

     

      실제로 호치민시에 화교들이 많이 산다는 '베트남의 차이나타운'이라 불리는 5군의 쩌런(Cho Lan)에 가 보아도 중국어를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인이나 중국어를 먼저 하는 손님에게 중국어를 하는 경우를 보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광동어여서 잘 알아 듣지를 못 했다. 옛날 화교들이 모여 거주하였던 지역이고 번성하였기에 사찰이나, 중국식 전통 건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일 뿐이다. 젊은 세대들은 한자를 배우지도 않고 있으며, 배웠다 하더라도 일부러 드러내 말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야 할 지 모르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는 한국보다도 더 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중국 전쟁은 1979년 2월 17일 ~ 3월 16일에 벌어진 것이니, 불과 4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베트남의 중장년 이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현장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1,000년의 중국 침락과 지배를 이겨낸 역사를 자부심으로 갖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차이나타운은 가당치도 않을 지 모른다.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독종은 분명한 것 같다. 서로는 배격하지 않고 손 잡고 우쭐되고 있는 대국 놈들에 당당히 버텨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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