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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망운산 망운암
    한국 관광 2024. 3. 20. 10:06

      우연히 망운사에 대한 유튜브를 발견하여 시청을 하였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기간동안 소설을 쓰겠다고 찾았던 곳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고 계시던 부모님의 고향 경상남도 남해군의 망운산. 망운산의 이름이 알려주듯이 구름을 내려다보는 산. 섬 중에서는 세번 째로 높은 봉우리를 자랑하는 곳이다. 당시 이 사찰은 망운사라 하지 않고 망운암이었다. 성각스님 한 분과 스님의 어머님이 보살로 두 분만이 망운암에 계셨다. 

      산 아래 마을에서 망운암에 오르려면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약 2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어두워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실을 한 번 다녀 오려면 아침 일찍 내려 가서 물건을 사곤 바로 되올라 와야 한다. 망운암의 두 곳이 내 가슴 속에는 무릉도원처럼 남아있다. 암자에 도착하기 전 약 5분거리에는 커다란 바위들로 이뤄진 정원. 해가 지기 전 바위 틈으로 운무들이 피어 오르고 마치 구름위에 앉아 신선이 된 듯한 기분으로 저 밑에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망운암에서 소설을 쓰면서 지낸 지 한 달 정도 후에 부산대의 한 청년이 들어 왔다. 보살들도 거의 찾지 않는 외딴 무인도와 같은 곳이었기에 사람이 너무 반가왔고 금방 친해졌다. 그 친구가 학보사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 하길래 내가 쓴 소설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어 보았는데 "그저 평범하네요"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다음 글을 쓸 힘을 잃어 버리고 원고지를 덮어 버렸다. 그래도 원고지에 자필로 써 왔던, 나의 첫 소설이기에 아직도 집에 어딘가에는 보관되어 있을텐데 그후 찾아 보질 않았다. 

      하루는 그 친구와 읍내 마실을 다녀오기 위해 산을 내려갔다 돌아 오다가 바위에 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스님 몰래 사 온 소주를 이 참에 마셔 증거를 인멸하고 들어가자고 하곤 둘이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운무가 다시 피어 오르고 우리는 구름 위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운무가 사라지자 우리는 너무 당황했다. 정말 눈 앞이 깜깜해 진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구름도 사라지고 나니 이젠 깜깜한 밤이 되어 버린 것이다. 200미터 앞에 암자에는 등불이 보였지만 바위 틈을 헤쳐 나가야 하고, 숲길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방법은 기는 것 뿐이었다. 사방이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둘은 땅 바닥을 기어 가면서 '부처님이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만약 안전하게 도착하면 목욕재계하고 1008배를 하자고 약속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20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그 곳을. 사찰에 도착하니 성각 스님은 빨리 씻고 자라고만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술에 취해 뭐라 하셨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저 혼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마을에 내려간 녀석들이 오지 않아 걱정을 하셨을 텐데 살아 들어 온 것 만으로 부처님 보살핌이라 생각하시고 '관세음 보살'이라 하셨지 않으셨을까? 둘은 샤워를 하고 약속한 1008배를 하기 위해 법당안으로 들어 갔다. 몇 배나 했을까? 기억에 남는 건 절을 하다가 "내일 하자...."라며 방으로 돌아와 뻗어버린 것 뿐이다. 

     

      무인도에서 나라의 평안을 위해 천일 기도하는 '성각스님'│73세에 매일 거친 산길을 올라 절벽 끝으로 향한다│고려시대 남해에서 가장 높은 산에 세워진 망운사│한국기행│#골라듄다큐 (youtube.com)

     망운사 성각스님

      망운암의 또 하나의 장관은 정상의 평지에서 보는 남해안의 경치이다. 남해의 마을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바다위에 떠 있는 선박들, 저 멀리의 섬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평화롭고 멈춰 있는 듯해 보인다. 

     

      해외생활을 오래동안 하면서도 항상 동경하고 있던 곳이 바로 망운산의 망운암이다. 한국으로의 복귀 명령을 받고 생활을 시작하던 때. 아들을 데리고 왕할머니를 보러 가자고 남해를 찾은 적이 있다. 그 중 하루는 망운암을 찾아 가 보기로 했다. 할머니 집은 읍내여서 택시를 불러 망운암에 가자고 하자 했다. 산에 다다라 이제 걸어갈 준비를 해 볼까 하는데 택시가 시멘트 바닥을 따라 산을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암자까지 길이 놓여졌다고 한다. 기사님은 그렇게 사찰앞에 너른 공터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얼마 후에 내려갈 것인지 물어 보기에 우린 걸어 내려갈 거라고 그냥 가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사찰에 들어 섰다. 

     

      '아.... 이제 망운암이 아니고 망운사구나' 법당과 숙소 만 있던 곳이 이제는 커다란 법당이 몇 개나 생겼는지 모르겠다. 자그마한 암자를 생각하고 있던 내겐 중건된 사찰이 위압감을 주는 듯 했고, 내 마음 속 그림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약간 속이 상하기까지 했다. 

      거대하신 사찰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내 마음의 안식처는 분명하다. 보살님들께 주지 스님이 계신 지를 여쭤보니 오늘 전시회가 있으셔서 부산에 가셨다고 한다. 아직도 수줍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온 모습이 부끄러워서일까? 큰 스님이 안 계신다는 말씀에 아쉬움도 있지만 한 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살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일주문을 나왔다. 아들도 나랑 사찰을 많이 가 보았기 때문에 '별 볼 것 없는데 왜 여기까지 올라 오셨어요?' 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내려 가는 길은 전에 다녔던 산길을 따라 내려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바위정원에 다다랐다. 아직 운무가 피어날 시간도 아니고, 먹을 것을 싸 온 것도 아니니 그저 아들에겐 저 아래 마을이 보이는 곳이고 이렇게 큰 바위들이 모여있는 것이 조금 신기할 뿐일 것이다. 아빠의 경험을 얘기해 주고서야 '그래서 아빠가 여기 오자 하셨군요' 라고 같이 온 것을 배려해주는 표정이다. 

      다음에 상진이가 성인이 되면 다시 한 번 이곳에 올라 소주도 한 잔 같이 해 보고 싶다. 

     

      어제 저녁 유튜브에서 우리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다. 30여년 만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내 눈엔 삼촌 같아 보인 젊은 스님이 이젠 정말 고승처럼 보인다. 스님이 그리시는 동자승 그림들을 보자 '아! 저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천진난만함. 아이의 순수함. 성각스님의 얼굴에선 그게 보인다. 삼촌 스님이었을 때나, 고승이 되신 지금의 얼굴에서도.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큰 스님을 찾아뵈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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