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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 바다 해 나무 꽃 사람이 아름다운 곳. 낙산사 템플스테이
    한국 관광 2024. 3. 22. 14:23

      몇 년전 다녀온 낙산사의 템플스테이때 적었던 일기를 보게 되었다. 당시 재현이는 고등학생이여서 와이프의 반대로 같이 가질 못 했다. 그 때 담겨진 사진들이 다시 한 번 자연의 아름다움과 한국의 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 용의 무리)과 천중(天衆: 하늘나라의 사람들) 등 8부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드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여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였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하였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1185년(명종 15) 당시의 병마사였던 유자량(庾資諒)이 굴 앞에서 예배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을 보고 지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도 불타 버렸고, 여의주와 수정염주는 이 절의 노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명주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감창사 이녹수(李祿綏)는 1258년(고종 45)에 각유(覺猷)에게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때 화를 당하여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불상의 복부 부분에 넣어 놓는 성스러운 물건) 속의 보물은 몽고병에게 약탈당하였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관음상을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오약(五藥)·색실·비단주머니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하였다. 1468년(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중창주로 삼아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다.

      1471년(성종 2) 선학(仙學)이 용선전(龍船殿)·영산전(靈山殿)·어제루(御製樓)·승당(僧堂) 등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4년 뒤 불탔으나 선학이 복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정취전·금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 종밀(宗密)이 중창하였고, 1643년 도원(道源)이 중건하였으며,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3년 4월, 당시 1군단장이었던 이형근(李亨根)이 원통보전·범종각(梵鍾閣) 등을 복구하였으며,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종각·일주문·천왕문·선실·승당·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99호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양양 낙산사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 원장(洛山寺垣墻), 보물 제1723호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紅蓮庵) 등이 있다. 이 중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반월형의 문루(門樓)인데, 낙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는데, 이 26이라는 숫자는 당시 강원지부(江原之部)의 고을 숫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를 하나씩 모아서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적토(赤土)로 빚은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4m, 둘레는 30여m에 이르고 있다. 근년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조각하였는데, 석재는 전라북도 익산의 호남 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으로 750톤이 소요되었다.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 둘레 3.3m, 좌대 넓이 6㎡이며, 좌대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 한 송이 연꽃으로 된 연봉(蓮峰)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밖에도 이 절 옆에는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전하는 자리에 세운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도량 전체가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2015년 현재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 낙산사 Daum 백과 인용 ]

     

    ■ 낙산사 템플스테이 1일차

       

      5시에 눈이 떴다. 씻고 챙겨져 있는 것들을 차에 실어 놓고 세차를 하고 집에 들어 오니 6 30분이었다. 상진이와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있자니 그제야 와이프가 일어난다. 자기가 차가 막히면 늦게 도착할 수 있어,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고 다그치더니, 8 30분이 되어서야 준비가 되어 출발하였는데 출근시간이다. 출발해서 5분쯤 지났을까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춘천 방향으로 가는게 좋다는 둥 뒤에 앉아 계속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그럴려면 니가 운전하던지..!” 버럭 화를 내고서야 차안이 조금 조용해 졌다. 사찰에 가는 분위기도 그만큼 쏴 해졌다

     낙산사 사찰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되었다. 낙산사 temple Stay 사무실에서 옷과 방을 배정받고 숙소로 들어가니 현대식 호텔 같았다이게 뭐지? 템플 스테이 아냐?’

    낙산사 일주문
    templs stay용 전통 한옥

      4시에 사찰 탐방 프로그램이 있는 곳으로 모이라고 해서 가니 그 쪽엔 temple Stay용 전통 한옥이 모여 있었다와이프가 남자 여자 따로 쓰는 방이 아닌 가족방을 요구해서 젊은이들이 오는 유스호스텔 방에 배정을 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 이 쪽은 에어컨이 나온다고 엄마 잘하지 않았냐고 상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진이가 요즘 알러지로 몸이 자꾸 가렵고 붓고 있고 혜영이도 그런 상태이니 둘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저녁 공양후 사찰을 다시 한 번 둘러 보고 돌아 왔는데 피곤이 확 몰려 오는게 느껴졌다.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고 해서 오늘은 108배 하는 것을 포기하고 저녁 사찰을 둘러 보기로 했다. 큰 후레쉬를 들고 해수관음상, 축전, 지장전을 지나 의상대를 돌아 보았다. 저녁 칠흙 같이 어두운 하늘에 횃불이 올라고 흘러 오고 있었다. 연에 불을 놓아 하늘에 날리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9시 였다. 하지만 힘이 들었는지 눕자 마자 잠이 들은 것 같다. 다음 날 들은 말인데 아빠가 코를 너무 세게 골면서 잤다고 한다. 차를 몰고 오면서 심신이 많이 피곤했던 것 같다.

     

     ■ 낙산사 템플스테이 2일차

     

      5 40분에 눈을 떴는데 밖이 조금 환해 보였다! 이미 해가 떠오르고 만 것인가!’ 그래도 나가 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의상대 쪽으로 가 보았다. 아직 해가 떠 있는 것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했다. 전에 어렸을 때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에서 일출을 보거나, 월드컵공원 산 정상에서 새해 일출을 볼 때는 깜깜한 하늘에서 저 멀리 갑자기 붉은 해가 하늘로 떠 올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는 이미 하늘이 파란데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6 30분 정도가 되었을까? 어딘선가 ~” 탄성이 들여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니 정말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의 장관이 펼쳐 졌다. 태양이 저렇게 강렬한 지 그리고 저렇게 빠르게 하늘로 솟구치는지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어제 제출해 버린 모바일이 너무 아쉬웠다.

      ‘내일도 오늘처럼 날씨가 이렇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장관을 보고 아침공양을 한 후 숙소로 돌아와 상진이와 바닷가로 향했다. 상진이 알러지 때문에 햇살을 받으면 안된다는 잔소리를 뒤로 하고. 동해안 바닷물은 이렇게 파랗고 맑은데 수심이 너무 갑자기 깊어져 상진이도 무서워 깊게는 못 들어가겠다고 한다. 잠시 바닷가를 거닐고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놀랍게도 옅은 구름이 태양을 가려 하나도 햇살에 타지 않은 것 같다. 오전 미팅에 참석하여 중요한 전화가 필요하다며 핸드폰을 반환 받았다. 큰 재산이나 얻은 것 처럼 뿌듯해지는 걸 보면 정말 애착에 집착에 매여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사찰의 사진도 담고 내일 아침엔 일출을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내 마음안에 이미 가졌으면 충분할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은 게다.

    낙산사 원통보전과 낙산사 7층석탑(보물 499호)

      오후에 어제 진행했던 사찰 탐방에 다시 참석하였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찰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상진이가 어제 갔다왔다고 안 갈 줄 알았는데 가자고 손을 끌더니 맨 앞줄에서 스님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신중히 스님의 말씀을 듣는게 찬 기특해 보인다.

    낙산사 보타전
    낙산사 의상대. 관동8경의 하나

      원통보전에 들어가 108배를 올렸다. 관세음 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과 같은 곳으로 조선시대 세조가 다녀간 후 법당 주변으로 벽도 만들었고 한다. 옆에 앉아 같이 108를 하며 염주를 꿔던 상진이는 30번 정도 절을 올리더니 주저 앉아 염주만 꾀었다. 그래도 기특하다. 아빠 옆에 앉아 끝까지 앉아 있더니 100번이 지나자 같이 108번까지 절을 하고는 같이 108배를 마친다108배를 하니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린다. 절을 하는 횟수가 늘어 날수록 몸은 지쳐가는데 마음은 또 그만큼 가벼워지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다.

      108배를 마친 것에 신이 났는지 신나게 퀵보드를 타고 원통법사를 내려오고 있다. 사찰안에 퀵보드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타는 녀석은 이 녀석이 아마 최초일 것 같다

      꿈이 이루어 지는 길을 따라 방문객들이 쌓아 올린 소망탑 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 지면 얼마나 좋을까? 

    낙산사 보타전 앞 연

      저녁 공양을 마치자 마자 상진이에게 수영복을 입으라 하고 다시 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이번에 정말 바다에 뛰어 들 작정이었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상진이의 말을 빌리자면 물이 너무 차가워 졌다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금방 이렇게 차가와 지나?’ 어찌 되었건 나로서는 다행이다. 이 녀석이 너무 좋다고 오래 있으면 달래서 물에서 끄집어 내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뭍으로 올라와 방파제가 있는 쪽으로 걸어 갔다. 낚시를 하러 나갔던 배들도 하나 둘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등대와 귀선하는 낚시배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재현이에게 108 염주를 만들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08배를 다시 한 번 해야 한다. 상진이를 꼬셔 7분의 관세음 보살을 모시고 있는 보타전으로 향했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려 하니 스님께서 이곳은 곧 문을 닫으니 의연암으로 가서 하라고 일러 주신다.

      하늘과 바다의 밤이 낮처럼 파랗게 보이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곳이다

     

      바로 옆에서 바다 소리를 들으며 절을 할 수 있는 곳. 도착하니 많은 신도분들이 자리를 하고 가운데에서는 스님께서 법문을 외우고 계셨다. 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일 여차하면 108배를 못할 수도 있고 그러면 재현이를 위해 염주를 못 만들 수도 있다.’ 스님의 옆 빈 공간에 방석을 깔고 108배를 시작했다. 스님의 앞쪽에 긴 방석이 있는데 감히 법문을 외고 계시는 스님 앞으로 가서 그걸 꺼내 올 수가 없었다. 30~40회가 지나갈 때쯤 무릎이 까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몇 번 일어서서 바지를 다시 추스려 입고, 쉬기도 했지만 점점 더 아파왔지만 이것도 일부러 부처님께서 해 보라는 것으로 느껴져 이를 악물고 108배를 마쳤다.

    낙산사 의연암

      어두운 해안가를 비춰주는 저 달의 기운이 어둡기만 한, 무섭기만 한 밤을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다

     

      ‘뭔가를 해 냈다는 작은 성과에 대한 큰 성취감이 나를 정말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도분들이 많아 사찰 밖에 앉아서 나를 기다려 준 상진이가 자기도 아빠를 기다리면서 아빠 핸드폰도 다시 정리해주고 신발도 다시 묶고 했다며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도 밤엔 더 이상의 주저 없이 잠이 들었다.

     

     ■ 낙산사 템플스테이 3일차

     

      오늘 아침의 일출은 내 핸드폰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어제 사찰 탐방을 주도해 주시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제 일출이 너무너무 환상적이었다고 말씀드리니 매 번 보니 이젠 그런 감흥은 없어요라고 하셨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이 이른 새벽에 홀로 나와 해수관음님께 오랜 시간동안 앉아 기도를 하시는 저 남자분은 무슨 고민을 그리 길게 털어 놓으시고 계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출 한 번 보았다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오늘 아침엔 6시에 해수 관음상 위로 올라 가서 여유롭게 해수욕장 쪽도 살펴보고 사리탑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천천히 의상대 쪽으로 내려와 해가 떠오르기를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는 내가 어제 그랬듯이 벌써 해가 떠 버리고 없는 거 아냐?’ ‘저 구름들 때문에 해가 가려져서 일출을 못 보나보다라는 식의 말들이 들려 오는 것을 들으며 속으로 조금 여유를 갖고 기다리시게나허허하면서 아는 척 허세를 부렸다.

    낙산대 의연암의 새벽

      이 곳 암자에서는 스님과 비구 한 분이 새벽 예불을 올리시고 계셨다. 오래 같이 하지 못할 것 같아 법당내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의상대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까? 스님의 말씀처럼 오늘의 일출은 어제의 일출보다는 감흥이 떨어졌다. 그 감흥보다는 사진기의 앵글이 어디가 더 좋을지에 신경이 더 쓰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 내 눈으로 직접 본 일출보다 사진이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저 이 다음에 이 사진을 보면서 지금의 그 느낌을 돌이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낙산사의 일출
    낙산사의 야생화

      들에 자유스럽게 핀 꽃들과 열매들이 인간이 그렇게 공들여 만들어 놓은 화원보다 훨씬 예뻐 보이는 것은 그것이 自然 그래도 이기 때문인 것 같다.

       2005년 화재 때문이였을까? 나무 가지들이 한쪽으로만 자라나고 있었다. 화재 바람의 방향에 따라 타지 않은 한 방향의 끈질긴 생명력일까? 아니면 태양의 힘을 받으려는 자연의 힘일까?

     

      11시에 퇴소를 위한 간단한 미팅을 한 후 점심 공양으로 일정이 끝이 났다. 처음에는 속초를 가볼까 아니면 양양의 다른 유명한 사찰이나 관광지를 가볼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바로 서울로 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상진이의 알러지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는게 귀경길 정체를 피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 생각했다. 역쉬나! 춘천을 지나는데 네비는 실시간 검색을 하여 다른 길을 추천한다며 외곽길을 일러 주었는데 시골 도로들을 약 40분 정도 돌다 보니 저 위에 고속도로가 보였는데 차들이 아예 꿈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3시쯤이나 되었을까? 와이프가 잠시 쉬어가자 해서 찾은 곳이 춘천 닭갈비와 막국수 집이였는데 들어가 보니 유명인들의 사인들도 많고 3시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객들이 들어 오는 것을 보면 유명한 맛집인가 보다. 내가 중학교 보이스카웃을 할 때 춘천 위도로 캠프를 왔던 이야기를 상진이에게 해주며, 닭갈비와 막국수를 맛보고 다시 서울로 출발하였다.

      관세음 보살님께서 우리를 계속 보살펴 주시는 지. 외곽을 돌아 바로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였는데 아까 보았던 정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로가 뻥뻥 뚫려 주었다목동에 도착하니 4 52분 그래도 선방한 것 같다. 태양볕 아래서 차량이 지치게 하지도 않고 무난하고 무탈하게 잘 다녀 온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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